메뉴 건너뛰기

[사법기관은 언제까지 가해자 편에만 설 것인가]

 

지난 1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재정비하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 내용에 따르면, 몇 년 동안 고통받던 피해자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자 고소했지만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청원에서 피해자는 ‘항거 불능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성범죄가 인정되고 이마저도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하는 성폭력 관련 법의 문제점과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수사기관들의 인식”을 지적했다. 청원이 올라온 지 약 10여 일 만에 2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만 성폭력 피해가 인정된다. 성폭력 피해자는 본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스스로 입증해야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는 ‘극도로 저항하면 강간할 수 없다’는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수사기관과 재판부 역시 성폭력 피해자에게 심각한 폭행 또는 협박 여부를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한국성폭력위기센터에서 2016년부터 3년간 무료법률지원 사건 결과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명시적인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고, 저항의 정도가 “잘 입증된” 경우에만 유죄 판단이 내려졌다. “폭행 또는 협박을 입증할 수 없다”,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니다”는 이유로 사법기관은 성폭력 범죄에 무죄나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서로 좋은 감정이 있었다”는 것 역시 무죄 판결 혹은 불기소 처분의 주요 이유로 언급되었다. 이는 연인, 부부 등 친밀한 관계에서는 성폭력이 발생할 수 없다는 잘못된 통념에 기반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국민청원이 국민들의 공분을 산 이유도 “서로 호감이었고 피해자가 먼저 스킨십을 했다”며 그러한 통념을 여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입증책임은 피해자에게 있지만, 피해자가 용기 내어 진술하더라도 ‘피해자다움’에 어긋나면 피해자의 진술은 배척된다. 반면 가해자의 반성과 인정, 자백은 너무도 쉽게 무죄, 감형, 불기소, 기소유예의 이유가 되어왔다.

 

사법적 처벌의 공백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로 인한 고통과 사회적 비난, 해결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가해자 중심의 성범죄 양형기준 재정비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넘어선 것은 성폭력 범죄 피해를 구제하기는커녕 가해자의 편에 서서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법기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성폭력 사건의 정의로운 해결은, 법이 피해자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할 때, 사법기관이 성인지적 관점을 가지고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함으로써 성폭력이 피해자의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국민청원 바로가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360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3 [화요논평] 성별 구분 빠진 '친밀한 관계'에 의한 살해 통계? 제대로 된 공식 통계 발표하라! admin 2024.08.21 115
192 [화요논평]한국 사회의 여성폭력 현실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복되는 우려와 권고 - 정부는 더 이상 국제법상 의무를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마라! admin 2024.08.08 130
191 [화요논평] 여성가족부 장관 공석 6개월째,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나 admin 2024.08.08 119
190 [화요논평] 여성폭력 없는 ‘당연한’ 세상을 위해 나아가자 - 한국여성의전화 창립 41주년 - admin 2024.08.08 97
189 [화요논평] 계속되는 친밀한 관계 내 여성살해, 논의가 아닌 대책을 촉구한다. admin 2024.08.08 97
188 [화요논평] 세월호 참사 10주기에 부쳐 –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요구한다 admin 2024.08.08 97
187 [화요논평] 22대 총선 D-1, 성평등을 향한 새로운 국회를 만드는 ‘용감한 투표’를! admin 2024.08.08 1925
186 진주 편의점 여성 혐오 폭력사건 2심 재판 엄벌 촉구 기자회견문 진해여성의전화 2024.06.20 153
185 (화요논평) 성차별로 얼룩진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 과정 - 정당은 이제라도 부적격한 후보에 대한 공천을 철회하고 성평등 국회를 만들기 위한 책무를 다하라 admin 2024.04.03 128
184 (화요논평) 대법원의 성인지적 관점에 대한 몰이해를 규탄한다! - 사법부는 대법관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성평등한 판결을 위해 노력하라 진해여성의전화 2024.01.31 129
183 ( 화요논평) 성범죄, 성차별 논란투성이인 정당의 예비 후보자들 - 각 정당은 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해 제대로 된 후보자 선출하라 진해여성의전화 2024.01.31 147
182 (화요논평) 2024년, 우리는 여성 인권의 현실을 변화시킬 것이다 - ‘여성’ 빠진 대통령 신년사에 부쳐 진해여성의전화 2024.01.31 156
181 (화요논평)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 한국은 여성폭력주간? 진해여성의전화 2023.12.11 142
180 (화요논평) 성찰 없는 '벼락' 징계로는 아무것도 바로잡을 수 없다 - '설치는 암컷' 등 연이은 정치권의 성차별 발언에 부쳐 진해여성의전화 2023.12.11 150
179 (화요논평) “페미라서 맞아야 한다”? - 여성폭력을 방치하는 정부 정부는 여성폭력 관련 인식 개선 예산을 전액 삭감한 예산안을 전면 폐기하라! 진해여성의전화 2023.11.10 128
178 (화요논평) 스토킹 가해자 처벌 않고, 피해자 지원 예산 축소하여 스토킹 근절하겠다? 국가는 구색맞추기식 스토킹 근절 정책 방향을 전면 개정하라!- 스토킹처벌법 시행 2년에 부쳐 진해여성의전화 2023.11.10 134
177 (화요논평) 스토킹 피해자 신변보호조치 중 발생하는 여성살해 사건이 벌써 몇 번째인가. 국가는 근본적인 신변보호조치를 마련하라. - 신당역 여성살해 사건 1주기 및 ‘인천 스토킹 여성살해 사건’에 부쳐 진해여성의전화 2023.09.21 154
176 (화요논평) ‘엑시트’ 해야 할 것은 여성가족부가 아닌, 성차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적절한 인사 즉각 중단하라! 진해여성의전화 2023.09.21 146
175 (화요논평) 문제도 해답도 각자도생인 사회, 이젠 정말 멈춰라. 성평등해야 안전하다. 진해여성의전화 2023.08.24 150
174 (화요논평) 전 여자친구니까 성폭력을 '가정적으로 승낙'했을 것이다? - 수사기관은 친밀한 관계 내 발생하는 성폭력에 관한 통념을 부숴라! 진해여성의전화 2023.08.11 141
SCROLL TOP